제 목 |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14 | ||
등록일 | 2022.12.16 | 조회수 | 756 |
<3부> 하류의 계절(季節)
유장식의 방위병(防衛兵) 근무(勤務)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장식이 거의 1년 동안 우체국(郵遞局) 천사(天使) 아가씨 윤혜경을 자전거(自轉車) 뒤에 태우고 귀가(歸家)한 횟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몇 차례 되지 않았다. 그날은 분홍색(粉紅色) 자운영(紫雲英)꽃이 흐드러진 봄날이었다. 신작로(新作路)를 벗어나 마을로 접어드는 들길은 너무 좁아져 자전거(自轉車)에서 내려 스무 세 살 청춘(靑春)남녀(男女)는 독배기 전방(廛房)에서 산 쿨민트껌을 하나씩 씹으며 한참을 말없이 걷는다. 봄이 무르녹는 들길은 비누 냄새 같기도 하고 아카시아꽃 냄새 같기도 한 냄새가 감싸여 흐르고 있었다. 너럭바위산이 가까워오자 멀리서 뻐꾸기 울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뜻하지 않은 실바람이 불어와 혜경의 하얀 블라우스를 살짝 나부끼고 사라진다. 흔들린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證據)다. 남도(南道)의 들판은 하염없이 흔들거리고 혜경의 가슴은 봄볕의 미세(微細)한 빛으로 일렁였다.
"우체국(郵遞局) 근무(勤務)는 할만 해?"
장식은 1년 전 처음으로 혜경을 자전거(自轉車)에 태우고 가면서 했던 질문(質問)을 그대로 반복(反復)하여 묻는 것이었다. 혜경의 대답(對答)은 참 밋밋했다.
"응."
"우리 저 자운영(紫雲英) 꽃밭에 좀 앉았다 갈까?"
"그럴까?”
한새봉으로 봄 햇살이 마지막 빗금을 그으며 넘어가자 들판이 불현듯 어 둑해졌으나 자운영(紫雲英) 꽃떨기에는 꿀벌들이 여전히 잉잉거리며 분주(奔走)히 꿀을 모으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같이 앉아보기도 첨이네." 장식이 겨우 입을 연다.
"그런가?“
장식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봄날의 자운영 꽃밭은 물방앗간 못지않게 위험해!‘
유장식은 방위(防衛) 근무(勤務)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대학(大壑) 졸업(卒業)이 가까워오자 대학(大學) 친구(親舊)의 이모님 동네인 경기도(京畿道) 하남시 샘재 천현리에 방을 얻어 외무고시(外務考試) 공부(工夫)를 시작했다. 하지만 장식이 보름 만에 짐을 싸서 샘재 마을을 뒤돌아 나올 때는 눈물이 났다. 장식은 세상(世上)일은 아무 것도 모른 채 혼자 무엇인가에 전념(專念)한다는 것이 죄(罪)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무엇보다 장식이 동막골 같은 천현 마을 외딴집을 떠난 것은 월남(越南)에서 돌아왔을 죽마고우(竹馬故友) 송창현의 묘연(杳然)한 행방(行方)과 강정옥의 애달픈 사연(事緣)이 훨씬 더 크게 작용(作用)했던 것이다.
송창현 상병(上兵)이 짜빈동 마을에서 우물물을 함께 길어오는 당번(當番) 조(組) 황덕글 일병(一兵)을 용케 따돌린 뒤 비탈진 언덕에서 나트랑항의 검푸른 바다를 닮은 응웬티린을 잠시 스치듯 만나고 막사(幕舍)로 돌아오는 참이었다. 창현은 막사(幕舍) 병사(兵士)들의 살벌한 눈빛과 악다구니에서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직감(直感)했다. 짜빈동 전투(戰鬪)가 개시(開始)되었던 것이다.
"짜빈동에서 베트콩을 완전(完全) 섬멸(殲滅)해야 한다. 귀신(鬼神) 잡는 해병(海兵)임을 명심(銘心)하라! 우리에겐 죽음이 최고(最高)의 명예(名譽)다!“
중대장(中隊長)의 목소리는 떨리듯 비장(悲壯)하였고 그이의 되돌릴 수 없는 명령(命令)은 막사(幕舍)를 쩌렁쩌렁 울리고 정글 속으로 메아리치곤 했다. 송창현 상병(上兵)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다만 두려운 것은 지난 5월 중순(中旬) 이후로 정옥의 위문편지(慰問便紙)가 끊긴 일이었다. 하지만 큰 키에 알맞게 살이 오른 계란형 얼굴로 항상 명랑(明朗)했던 정옥에 대한 추억(追憶)은 송 상병(上兵)의 짜빈동 전투(戰鬪)근육(筋肉)을 더욱 불끈거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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