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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7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732

그때 봉제공장(縫製工場) 입구(入口)에 노란색 택시가 한 대 멈추더니 젊은 사내가 먼저 내리고 뒤이어 정옥이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창현은 눈을 곤두세우며 그들을 바라본다. 정옥이와 창현의 눈이 마주친 것은 사내가 다시 택시에 올라타고 사라진 뒤였다.

 

"정옥아 어디 아팠어?"

"으응 좀 마음이. 근데 웬일이야? 또 휴가(休暇) 나왔어? 연락도 없이? 혹 탈영(脫營)한 거 아니야?“

 

창현은 정옥이가 예전처럼 밝고 명랑(明朗)해서 안도(安堵)했으나 말투가 예전 같지 않아 다시 불안(不安)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금방(今方) 퇴근(退勤) 도장 찍고 나올게요.“

 

둘은 황혼(黃昏)이 내리는 서녘 바다를 바라보며 대반동(大盤洞) 간이(簡易)주점(酒店)에 마주 앉았다. 잠시 뜻하지 않는 침묵(沈默)이 흘렀다.

 

"왜 말끝에 '~'를 붙일락 말락 하는 거여? 전엔 안 그러더니?"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요.”

"음마 또 그러네. 예전처럼 편하게 말하자 우리."

"나 카수 될래요."

"아니 뜬금없이 카수라니?"

"창현씨는 꿈이 뭐예요?“

 

꿈이란 말에 창현은 가슴이 턱 막혔다.

 

"4일 후면 부산(釜山)에서 배를 타고 월남(越南)으로 떠나.“

 

정옥은 그다지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창현씨가 지원(志願)했어?"

"아니 뭐... 그런 셈이지 뭐.“

 

둘은 거의 동시에 아나고회 안주(按酒) 곁에 놓인 맥주(麥酒)를 들이켰다.

 

"나 서울 음악학원(音樂學院)에서 가수(歌手)를 시켜준다는 연락(連絡)을 받았어. 예명(藝名)은 정세희.”

"정세희라고야? 차라리 옥정이라고 하지 왜?"

 

창현은 약이 올라 정옥에게 비아냥대듯 역정(逆情)을 냈다.

 

"정옥은 촌스럽잖어. 옥정은 무슨 기생(妓生)이름 같고."

"그런디 아까 같이 택시타고 온 놈은 누구야?"

"놈은 아니고, 꽤 괜찮은 사람이랑께! 서라벌(徐羅伐) 예술대학(藝術大學) 댕기다 휴학(休學) 중이라더라.”

 

정옥은 두 잔째 맥주(麥酒)를 목으로 넘기더니 목청이 제법 높아지면서 예전 말투로 돌아왔다.

 

"그놈이 음악학원에 다리를 놔준 거구만?”

"그렇당께! 그러고 그 사람한테 놈놈 하지 말어야!"

"좋기도 하겠다. 카수는 아무나 한다냐? 노래 잘하는 사람이 너 말고도 쎄고 쎘는디야.“

 

둘의 대화(對話)는 어긋나고 있었으나 물방앗간 첫 입맞춤의 짜릿한 기억(記憶)만은 서로 합치(合致)하고 있었다.

 

중학교(中學校)를 졸업(卒業)한 다섯 명의 어린 청춘(靑春)들은 처음부터 갈 길이 정해져서 묵묵히 제 길로 접어들었다. 창현은 강진(康津) 남포리에 사는 외사촌형을 따라 탐진강(耽津江) 여울목 뻘밭을 넘나들며 짱뚱어잡이로 나섰고, 하대성은 울애들가 막걸리통 배달꾼이 되었다. 정옥은 물레방앗간 일꾼인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동네 미나리꽝에서 일손을 도와 푼돈을 모으고 있었다. 성요셉여고에 진학한 맬젓장시 딸년 윤혜경은 금당 마을 주막 앞 정류장(停留場)에서 매일 아침 다소곳이 책가방을 들고 읍내(邑內)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充分)했다. 유장식은 홀어머니와 살아가는 소년가장(少年家長)이나 다름없었다. 어찌어찌해서 중학(中學)을 겨우 마칠 수 있었고 공부(工夫)는 꽤 잘했으나 고교(高校) 진학(進學)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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