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8 | ||
등록일 | 2022.12.16 | 조회수 | 686 |
"장식아, 니 재능(才能)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다. 일단 광주무등고 입시(入試)에 응시(應試)는 해봐라." 장식의 담임(擔任)선생은 느긋하게 장식을 달랜다.
"일단 무등고(無等高) 합격(合格)만 하면 무슨 수가 나지 않겠냐?"
“선생님, 그것은 저의 길이 아닌 것 같어요."
장식은 마음에도 없는 엉뚱한 말을 하고 나자 마음속은 더욱 혼란(混亂)스러웠다. 명문인 무등고등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인생(人生)이 황홀(恍惚)하고 만사형통(萬事亨通)일까? 열일곱 미완(未完)의 장식에겐 무등고(無等高) 입학(入學)은 엄청난 압박(壓迫)과 짐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장식은 무등고(無等高) 입학시험(入學試驗)에 합격(合格)했고 그의 무등고(無等高) 등록금(登錄金)과 자취(自炊)방을 마련하기 위해 담임(擔任)과 학교 선생(先生)님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성진 농협(農協)과 우체국(郵遞局), 보건소(保健所) 직원들도 모금에 동참(同參)했던 것이다.
"장식아 잘 가라. 넌 우리 마을의 희망(希望)인께, 공부(工夫) 열심히 하고잉.“
유장식과 송창현은 집이 바로 이웃인 까닭도 있었으나 말문이 트이고 조금씩 밖으로 돌기 시작한 때부터 유달리 둘이서 꼭 붙어 다니는 모습은 옆 동네까지 소문(所聞)이 날 정도(程度)였다. 장식은 창현과 헤어진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장식은 홀로 남을 어머니는 산등성이에서 겨우 떼어놓았지만 삼거리 정류장(停留場)까지 따라온 창현이가 외려 야속(野俗)하다는 생각이 밀려와 콧날이 시큰해온다.
"그려. 잘 지내라. 편지(便紙)할게.“
장식은 눈물로 광주행(光州行)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인생살이에서 헤어짐이란 가슴 아픈 일임을 처음으로 절감(切感)하는 순간(瞬間)이었다.
정옥이 목포(木浦) 삼학 봉제공장(縫製工場)에 들어온 지도 석 달째 접어들고 있었다.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얼굴도 예쁘고 바느질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정옥은 봉제공장(縫製工場)의 꽃이었으나 저녁 늦게 일을 마치고 자취(自炊)방에 누우면 늘 알 수 없는 허허로움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왠지 창현에게 위문편지(慰問便紙) 쓰는 일도 별로 신이 나지 않았다. 이런 정옥의 가슴에 헛바람을 넣은 건 봉제공장(縫製工場) 사장(社長) 아들 민경후였다. 경후는 서라벌(徐羅伐) 예대(藝大)를 다니다 휴학(休學) 중이라고 했다. 민경후는 날마다 봉제공장(縫製工場) 주변(周邊)을 하릴없이 배회(徘徊)하거나 기타를 둘러메고 나타나기도 했다. 경후는 공장(工場) 울타리로 쳐놓은 바윗돌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대반동(大盤洞) 종점(終點)의 파도(波濤)소리와 경후의 기타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정옥이가 돌리는 재봉(裁縫)틀 위에도 살며시 얹히곤 하였다.
"아니, 뭔 생각을 하길래 재봉선(裁縫線)이 이 모양이여!“
작업반장(作業班長)이 정옥을 향해 불호령을 날린다.
"아무래도 요즘 수상(殊常)해. 뭔 일 있는 거여?“
지난 토요일(土曜日)이었다. 정옥은 생리통(生理痛)이 너무 심해 오후(午後) 작업(作業)을 도저히 감당키 어려워 어렵사리 조퇴(早退)를 하고 자취(自炊)방에 누워 설핏 잠이 들었다. 그때였다. 방 문고리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나 싶더니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정옥은 너무 놀라서 방문을 잠그고 누구냐고 물었으나 대답(對答)이 없었다. 대신 기타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곡목(曲目)을 알 수 없는 낯익은 음률(音律)이었다. 한 참 동안 파도(波濤) 소리인지 기타 소리인지 뒤범벅이 되더니 갑자기 총성(銃聲)이 울렸다. 정옥은 놀라 잠에서 깼다. 꿈을 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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