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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13
등록일 2022.12.18 조회수 829

偶吟(우음/우연히 읊다) - 남명

붉은 꽃송이 핀 작은 매화나무 아래서
큰 소리로 요전(堯傳)을 읽어보네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밖이 밝아오고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만 떠도네

朱點小梅下(주점소매하)
高聲讀帝堯(고성독제요)
窓明星斗近(창명성두근)
江闊水雲遙(강활수운요)

 

요전(堯傳) : 요임금의 가르침

 

 

헛된 이름으로 출세(出世)하는 것보다 곡식(穀食)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어명(御命)을 거역(拒逆)하는 남명(南冥)의 상소(上疏). 자신(自身)에 대한 세상(世上)의 명성(名聲)이 한갓 허명(虛名)에 불과(不過)하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명성을 허명으로 치부(恥部)할 정도로 치열(熾烈)하게 살았던 남명은 천왕봉(天王峯)을 사랑하다가 권왕봉이 되어버린 사내다. 그가 그립다. 남명(南明) 조식(曹植)

 

덕천강(德川江) 둑길을 따라 걷는데 맞은바라기의 지리산 천왕봉이 성큼 내려오고 있다.

 

먼산바라기 : 먼 곳만 우두커니 바라보는 일

개밥바라기 :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저녁샛별=장경성(長庚星)=태백성=어둠별

맞은바라기 : 앞으로 바로 보이는 곳 = 맞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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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에서 중산리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와 대원사(大源寺)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가 이곳에서 합류(合流)하여 덕천강(德川江)이 몸집을 불린다. 발로 밟고 눈에 넣고 가슴에 담고 지냈던 순간들이 벌써 그리움이 된다. 강에서는 여인네 두 사람이 물속에 앉아 다슬기를 잡으며 옴지락거리고 있다.

 

아둔한 탓이겠지만 꺽지회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강변길 오른쪽으로는 덕천강(德川江)을 따라 냇가에 자리한 들녘인 천평이다. 바람 없는 강변길은 고요하고 중복(中伏)을 사나흘 앞둔 햇발은 맹렬(猛烈)하다. 감나무 잎도 땡볕에 기운을 잃었다. 여름 하늘이 푸르러 강물도 푸르고 들녘도 푸른데 덕천강(德川江) 둔치의 참나리는 제 혼자 붉음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아둔하다 : 슬기롭지 못하고 머리가 둔하다.

둔치 : 물가의 언덕, 강 호수 등 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둔치 : 감각이 둔하고 미련한 사람

 

중태마을은 닥종이 생산지(生産地)로 유명(有名)한데 지금은 닥종이 소비(消費)가 끊이면서 닥나무 대신 감나무가 들어섰다. 중태마을은 동학(東學) 혁명(革命)때 동학 농민군(農民軍)이 관군(官軍)을 맞아 마지막 녹두꽃이 졌던 곳 가운데 하나다. 중태마을에서 한 시간쯤 깔끄막을 오르면 산꼭대기 바로 밑에 자리한 유점마을이 나온다.

 

물이야 높을수록 맑은 것이 당연지사(當然之事)인지라 그 안에서 노니는 갈겨니와 다슬기가 평화(平和)롭다. 잎보다 가지가 많은 늙은 서어나무가 제공(提供)한 그늘은 나이만큼 두텁지 않다. 끝없이 펼쳐지는 감나무밭은 덕산장이 곶감장으로 유명한 이유(理由)에 대한 실증(實證)이다. 이곳 곶감은 지리산의 건조(乾燥)한 바람과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차가운 기운이 빚어낸 합작품(合作品)이다. 칠산 앞바다의 조기가 영광에서 굴비가 되듯이 지리산의 고종시(高宗柹)가 덕산(德山)에서 천하일품(天下一品) 곶감이 된다. 서늘한 기운과 등산화(登山靴)를 통해 느껴지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感觸)이 살피를 대신한다.

 

갈겨니 : 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고기, 잉어과

반증(反證) : 어떤 사실이나 주장이 옳지 아니함을 반대되는 근거를 들어 설명함

 

살피 : 땅과 땅 사이의 경계선을 나타낸 표, 물건과 물건 사이를 구별지은 표

 

고종시(高宗柹) : 보통 감보다 잘고 씨가 없으며 달다

 

고갯마루에 아픈 사연(事緣)을 소개하는 안내판(案內板)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좋을 성싶다. 지나간 사람들이 돌멩이 하나씩이라도 올려 넋을 위로(慰勞)하고 땅의 평화(平和)를 기원(祈願)할 수 있도록...

 

대나무밭은 오래전 논밭의 흔적(痕迹)인 양 층층이 두렁이 남아 있다. 버려진 천둥지기에 벼 대신 대나무가 자라 하늘을 가리고 있다.

 

천둥지기 : 빗물에 의해서만 벼를 심어 재배할 수 있는 논

 

대나무밭에 들어서면 개기일식(皆旣日蝕)처럼 어둠살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해를 삼킨다. 대밭 안의 세상(世上)은 대밭 밖의 세상(世上)과 별개로 움직인다. 마치 시간 이동을 한 듯 낯설면서도 또 익숙하다. 복면(覆面) 자객(刺客)들이 대나무를 거꾸로 타고 내려오는 장면(場面)은 대밭이 주는 기시감(旣視感)이다.

 

고래실 :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

어둠발 : 어두워지는 기세

어둠살 : 어두워지는 기미

 

기시감(旣視感) :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 =데자뷰

 

미시감(未視感) :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모두 처음 보는 것처럼 느낀다.

 

대숲에서는 솔도 대나무처럼 운다. 대숲에서는 소나무의 꿈도 대나무처럼 서글프다. 다시 보니 대나무 숲에 홀쭉한 갈색(褐色) 기둥이 드문드문 숨바꼭질하듯이 대숲에 섞여 있다. 살기 위해 옆으로 뻗은 잔가지다. 사시사철 푸름을 자랑하는 바늘잎도 다 버리고 대나무를 닮은 매끈한 몸통만 드러내고 있다. 높이 치솟아 보이지 않는 끝자락 어디쯤에 잔가지나 푸른 잎이 하늘을 보며 대나무와 다투고 있을 것이다. 어찌하랴. 산다는 것은 애증(愛憎)으로 부대끼며 이리 닮아가는 것임에야...

 

대밭을 나오면 세상(世上)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밝은 하늘이 열리고 땅에는 실한 벼들이 푸르다. 대밭을 타고 내려온 물은 실개천으로 흘러 위태마을 뒷산 기슭에 아담한 저수지(貯水池)를 이룬다. 거울처럼 맑은 저수지에 뭉게구름이 쉬어가고 건너편 산기슭의 오리나무도 슬며시 내려온다. 왼편의 능선(稜線)은 마치 자를 대고 하늘에 선을 그은 듯 반듯하다. 능선이 하도 반듯하여 산 위로 뜨는 보름달이 수평선(水平線)의 해돋이와 다를 바 없을 듯하다. 한낮의 길었던 해도 어느덧 민박집 지붕을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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