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무엇이든 쓰게 된다. by 김중혁-15 | ||
등록일 | 2023.01.03 | 조회수 | 1,040 |
트럼보는 타자기(打字機)를 치는 게 아니라 연주(演奏)하는 것 같다. 잔뜩 웅크린 채 자판(字板)을 두드리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간절(懇切)하게 자판(字板)을 누른다. 지금도 귓속에서 타자기(打字機) 소리가 어른거린다. 트럼보는 탁자(坼字)와 소파와 욕조(浴槽) 등 때와 장소(場所)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쓰는 그의 열정(熱情) 때문에 딸의 생일(生日)에도 욕조(浴槽)에 틀어박혀 글을 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너덜너덜해진 시나리오를 매만지면서 다음 대사(臺詞)를 생각하는 트럼보의 모습을 보면 글쓰는 게 저렇게 재미있는 작업(作業)이었다는 사실(事實)을 새삼 깨닫는다. 소설(小說)이나 시나리오를 써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방을 서성거리며 주인공(主人公)의 다음 대사(臺詞)를 떠올릴 때의 긴장감(緊張感)과 짜릿함을...
이야기를 시작(始作)하는 방법(方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만약(萬若)으로 시작(始作)하는 설정(設定)이다. 만약(萬若) 외계인(外界人)이 지구(地球)에서 노동자(勞動者)로 살아간다면? 외계인(外界人)이 농장(農場)의 소녀(少女)를 임신(姙娠)시킨다면? 아이들이 외계인(外界人)을 농장(農場)에 숨겨준다면?
글을 쓰는 작가(作家)에게 만약(萬若)은 만병통치(萬病通治) 약(藥)과 같다. 만약(萬若)은 모든 것을 가능(可能)하게 한다. 사람이 우주(宇宙)를 날게 만들 수도 있고 사람이 개미보다 작아질 수도 있다 만약(萬若)이 없었더라면 수많은 작가(作家)들이 글을 시작(始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방법(方法)은 체험(體驗)이다. 어떤 일을 겪어보는 것만이 아니고 장면(場面) 속으로 직접(直接) 뛰어드는 일도 포함(包含)된다. 생각만으로는 안 되고 글로 직접(直接) 써보면 알게 된다. 어떤 이야기든 말로는 모든 걸 설명(說明)할 수 없다. 써보면 알게 된다. 써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단정(斷定)할 수 없다. 왜 배신(背信)할 수밖에 없는지 써보면 알게 된다.
작가(作家)는 만약(萬若)과 체험(體驗)이라는 두 가지 날개를 달고 글을 쓴다. 만약(萬若)이 없는 체험(體驗)은 퍽퍽한 닭가슴살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고, 체험(體驗)이 없는 만약(萬若)은 앙꼬없는 찐빵이 된다. 만약(萬若)과 체험(體驗)을 한 방향(方向)으로 잘 몰고 갈 때 이야기의 맛이 살아난다. 같은 방향(方向)으로 몰기 힘들면 두 마리의 토끼를 싸움 붙인 다음 둘 다 힘이 빠졌을 때 잡아채기라도 해야 한다.
좋은 이야기의 특징(特徵)은 만약(萬若)과 체험(體驗)이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만약(萬若)으로 시작(始作)했지만 만약(萬若)이 끝까지 살아남으면 안 된다. 어느 지점에서 만약(萬若)을 죽여야 한다. 또는 만약(萬若)을 넘어서야 한다. 지구(地球)를 향해 날아오는 혜성(彗星)을 이야기한다면 중요(重要)한 것은 지구(地球)와 혜성(彗星)이 아니라 지구(地球)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책(冊)의 표지(表紙)가 첼로를 그린 것인지 바이올린을 그린 것인지 분명(分明)하지 않았지만 푸른 빛을 띤 그림에서 어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국판(韓國版) 표지(表紙)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묘사(描寫)한 그림 같다면, 일본판(日本版) 표지(表紙)는 오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잡아챈 장면(場面) 같았다.
서점(書店)에 깔린 책(冊)들의 표지(表紙)를 보면서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이유(理由)를 제대로 설명(說明)하기 힘들었는데 바로 그 두께 때문이었다. 어떤 책(冊)은 일러스트레이터의 흔적(痕迹)이 강하게 드러나서 책(冊)의 분위기(雰圍氣)를 해(害)치고 어떤 표지(表紙)는 책(冊)의 내용(內容)을 이해(理解)하지 못한 듯한 그림 때문에 도무지 읽을 맛이 나질 않는다. 어떤 책(冊)은 그림이 두꺼워서 책(冊)의 내용(內容)이 잘 보이지 않고 어떤 책(冊)은 그림이 얇아서 마치 표지(表紙)가 없는 것처럼 책(冊)이 앙상해 보인다. 그의 사무실(事務室)은 컴퓨터보다는 널찍한 책상(冊床)이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마우스보다는 펜과 잉크가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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