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무엇이든 쓰게 된다. by 김중혁-11 | ||
등록일 | 2023.01.02 | 조회수 | 751 |
글쓰기에 익숙해지면 글쓰기로 더 많은 것을 표현(表現)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명사(名詞)와 동사(動詞)뿐만 아니라 형용사(形容詞) 부사(副詞) 감탄사(感歎詞) 의성어(擬聲語), 의태어(擬態語)로 더 잘 묘사(描寫)할 수 있게 된다. 간단(簡單)한 트릭으로 문장(文章)에 긴장감(緊張感)을 더할 수도 있게 된다.
종이 위의 문장(文章)들은 현실(現實)과 무척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글을 쓰는 사람은 종이 위에서 새로운 현실(現實)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가보지 못한 길을 상상(想像)할 수 있다. 픽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부분(大部分) 글이 그렇다.
우리는 글 속에서 새로운 우리를 창조(創造)할 수 있다.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인 척 할 수 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努力)하는 것과 더 나은 사람인 척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글쓰기는 혼자 해서 좋지만 혼자 하기 때문에 위험(危險)하다. 글쓰기는 자기(自己) 합리화(合理化)의 좋은 도구(道具)가 될 수 있다. 실제(實際)가 아닌 글쓰기 속에서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말은 뱉으면 그만이지만 글은 발표(發表)하기까지 수십 번 수백 번 고칠 수 있다.
당신 안에는 당신이 모르는 예술가(藝術家)가 있다 예술가(藝術家)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덧붙이는 소조(塑造)의 방식(方式)도 필요(必要)하지만, 필요(必要)없는 것을 걷어내는 조각(彫刻)의 방식(方式)도 필요(必要)하다. 소조(塑造)한 다음 그걸 다시 조각(彫刻)해 내거나 잘못 조각(彫刻)한 부분(部分)을 다시 소조(塑造)할 수도 있다. 이것이 누군가에게 예술(藝術)을 가르치는 방식(方式)이다.
예술가(藝術家)란 온 힘을 다해서 창조적(創造的)인 혁신(革新)을 이루려는 사람이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유희(遊戲)에 전념(專念)하는 사람이다. 아름다움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름다움을 넘어 창조(創造)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 예술(藝術)이다. 아이들은 재산(財産)과 권력(權力)에 관심(關心)이 없다. 자신(自身)을 ‘남이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자의식(自意識)도 없고, 자신(自身)이 세계(世界)를 제패(制霸)하고자 하는 야심(野心)도 없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 걱정도 없다. 무작정(無酌定) 노래하고 읽으며 춤을 추며 논다. 예술가(藝術家)도 그래야 한다.
예술가(藝術家)들은 왜 그렇게 혼신(渾身)의 힘을 다해 창조적(創造的)인 혁신(革新)에 몰두(沒頭)할까? 창조성(創造性)의 동기부여(動機附輿)는 내재적(內在的) 동기(動機)가 압도적(壓倒的)으로 중요(重要)하다. 내재적(內在的) 동기(動機)로 시작(始作)된 행동(行動)은 실패(失敗)의 위험(危險)을 무릅쓰고 새로운 대안(代案)을 내놓는다. 스스로 흥(興)에 겨워 혼신(渾身)의 힘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내재적(內在的) 동기(動機)다.
무언가 창작(創作)을 위해서는 아이처럼 내재적(內在的) 에너지가 필요(必要)하다. 아이의 에너지란 내가 사라지고 머리가 텅 빈 상태로 순전히 어떤 것에 집중(集中)하는 것이다. 아이는 성취(成就)도 보상(補償)도 필요(必要)하지 않다. 아이 마음에 맞는 작품(作品)이 나오면 된다. 글을 쓸 때도 그렇게 써야 한다.
자의식(自意識)이나 완성도(完成度)에 집착(執着)하지 않고 온전히 매력적(魅力的)인 한 줄의 문장(文章)을 간절(懇切)히 원할 때가 있다.
글과 그림은 완전히 다른 방식(方式)으로 창작(創作)된다. 글쓰기는 빨래가 끝나 옷을 차곡차곡 개켜 넣는 일이라면, 그림 그리기는 차곡차곡 정리(整理)된 옷을 헤집어 꺼내서 해쳐놓는 일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모아야 하지만, 그리기 위해서는 흐트러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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